에드워드 스노우든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국가안보국(NSA) 기밀을 폭로한 그는 헌법을 수호해야 할 입장임에도 서약을 어기고 민주절차를 무시했으며 이제 베이징, 모스크바, 이제 아바나 등지로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사이버 스파이활동을 억제하려는 스노우든의 허무맹랑한 전략은 곰곰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핵무기를 억제하려는 버락 오바마의 전략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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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노우든이 모스크바에서 아바나로 가기 위해 예약했던 아이로플로트 여객기좌석이 빈 채로 남았다.
스노우든의 접근법은 오바마 대통령이 주창하는 “핵 제로(nuclear zero)” 즉 핵이 없는 세상 접근법에 비추어 “사이버 제로”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원대한 꿈과 잘못된 국가안보 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스노우든이 추구하는 건 무엇인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주장한 것과는 달리 스노우든은 헌법이 보장한 사생활 보호 권리를 침해받게 된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내부고발자”가 아니다. 오히려 국민들의 사생활 보호 권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밀(어떻게 미국 정부가 중국 내 컴퓨터 네트워크나 영국에서 벌어지는 외교관들의 회의를 모니터하는지와 같은 정보)을 폭로함으로써 그보다는 훨씬 큰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노우든 폭로기사 대부분을 다룬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글렌 그린왈드 기자가 CNN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부터 그는 NSA의 활동이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른 나라 정부들과 공조해 전세계인을 목표로 삼아 프라이버시와 익명성, 인터넷 자유를 침해하고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글로벌 감시망을 가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노우든은 스스로 전세계인의 프라이버시와 인터넷 자유를 위해 싸우는 셈이다.
그가 택한 방식은 미국 정부의 자료수집노력을 비하하고 배후에 있는 관리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정보를 유출하는 것, 그로 인해 기존 프로그램을 약화시키고 국내외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못하게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그의 방식은 어느 정도까지는 효과가 있었다. NSA 키스 알렉산더 국장은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불만을 토로했으며, 정부는 분노한 유권자와 각국 정부가 제기하는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스노우든의 폭로가 훨씬 더 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상상해보자. 시민 수십만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항의시위를 벌이고, 정부가 NSA를 폐쇄할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되고, 미국을 사이버 스파이 활동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새로운 ‘교회위원회’를 소집하는 상황 말이다. 그랬다면 뭐가 달라졌을 것인가? 세계는 여전히 갖가지 이유를 들어 사이버 스파이활동을 자행하는 정부(와 민간단체)들로 가득할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이란이 대표적이다. 스노우든은 미국이 사이버 스파이활동을 그만둔다고 이런 나라들이 프라이버시와 인터넷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국내외 디지털 감시활동에서 손을 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런데도 현재 오바마 행정부는 이와 유사한 계산 하에 핵무기정책을 밀어부치고 있다.
“핵 제로”는 처음부터 오바마 대통령의 우선순위였다. 러시아, 나토, 유럽과의 관계에 핵심이며 수많은 외교적 승인과 정상회담, 연설의 주제로 활용됐다. 지난주 베를린 연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0년 러시아 정부와 맺은 ‘신 전략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이나 미국이 보유한 핵무기를 3분의 1로 줄이겠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최근 제안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핵 제로”의 실현은 다른 나라들(모든 다른 나라들)에 달려있었다. 미국의 주도를 다른 나라들도 따라야만 가능한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나 이란, 중국은 물론 추가 감축에 반대하고 나선 러시아조차 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프라하 연설에서 “도덕적 리더십은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다”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새로운 핵탄두 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공약하고 기존 핵인프라의 현대화를 거부한 채 자기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핵 제로” 공약 자체를 폄하하며 미국의 주도에 콧방귀를 뀌는데도 이런 상황은 무시하고 있다. 지난주 베를린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과 이란을 핵무기를 “추구할 지 모를” 나라들로 단 한번 언급하고 지나갔다.
핵 현실을 부정하는 대통령의 고지식함은 에드워드 스노우든이 자기를 도와줄 나라들의 사생활 침해상에 침묵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홍콩에서 인터뷰하는 동안 스노우든은 중국 정부가 13억 중국 국민의 언론의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는지 혹은 2009년 7월부터 (크기가 독일의 5배에 이르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인터넷을 어떻게 차단했는지를 지적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스노우든이 러시아에 도피해 있는 동안 블라디미르 푸틴의 야만적인 정보통제 시스템을 폭로해 살해당한 안나 폴릿콥스카야 등 많은 저널리스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스노우든의 범법행위와 재임에 성공했으며 “핵 제로” 같은 정책 아이디어의 지지도에 부분적인 책임이 있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결정은 도덕적 무게가 다르다. 스노우든은 모든 정치적 책임체계를 무시한 채 언론에 폭로하는 식으로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할 권리가 없었다. 반면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바로 기준이다.
그러나 “핵 제로”와 일방적인 군축 논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는 문제다. 미국이 핵무기를 감축하겠다고 선언해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이란이나 북한, 중국의 핵무기 감축이 아니라 증강이다. 핵 문제나 사이버 스파이활동 문제나 미국이 손을 뗀다고 선언하는 것 자체가 도발이다. 모든 사람이 천사인 세상이 아니고서는 “핵 제로”의 꿈보다 핵 저지가 책임있는 전략일 것이다.